국제정치학

2005 외무 국제정치학 3문

정비완 2025. 6. 12.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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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문제는 19세기 전 기간에 걸쳐 유럽외교의 핵심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물음에 답하시오

 

1) 동방문제의 의미와 동방문제가 19세기 유렵외교의 중심의제로 등장하게 된 배경을 기술하시오

2) 19세기 동방문제와 관련한 당시 유럽열강의 이해관계(러시아,오스트리아,프랑스,영국,프러시아)에 대해 기술하시오

 

 

짧은 문제이지만 상당한 내공을 요구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옛날 문제들이 대체로 이런거같다.) 동방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필요한 내용이다. 

 

 

I. 서론 

      니콜라이 1세는 오스만제국을 이른바 유럽의 병자라고 부르며, 오스만 제국이 열강의 외교적 처분 대상이 되었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따라서 동방문제란, 오스만 제국의 점진적인 쇠퇴 및 해체에 따라 발칸반도, 흑해, 동지중해 등 전략적 요충지를 두고 유럽 열강이 정치·군사적으로 개입하며 발생한 국제적 갈등 및 외교문제를 말한다.

이는 단순한 지역분쟁이 아니라 국제질서의 재편성과 직결되었으며, 유럽 세력균형 체제의 안정성과 직결되는 문제로 간주되었다. (1) 동방문제의 개념 및 유럽외교의 중심의제로 부상한 배경을 먼저 정리한 뒤, (2)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랑스, 영국, 프러시아 등 주요 열강의 이해관계를 기술한다.

 

II. 동방문제의 정의와 19세기 중심의제로의 부상 배경

 

1.대내적 요인: 오스만 제국의 약화와 민족주의의 확산

오스만 제국의 쇠퇴: 17세기 말 대튀르크전쟁 이후 오스만은 영토를 잃고, 18세기~19세기 초까지 중앙집권력 약화, 내란, 경제침체가 이어졌다. 이는 제국의 해체를 가시화시켰다.

민족주의와 자결의 확산: 발칸 내 슬라브계, 그리스계 민족들이 독립을 요구하면서 오스만 내 민족문제가 폭발하였다. 이는 국내 정치 안정과 직결된 유럽 각국의 외교적 이해를 자극하였다.

 

2.구조적 요인: 빈체제의 성립과 열강의 식민지경쟁

나폴레옹 전쟁 후 1815년 빈 체제 하의 유럽은 세력균형을 통해 안정된 국제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붕괴는 이 세력균형을 위태롭게 하는 요인이었고, 현상타파를 시도하는 국가에게는 기회이자 현상유지를 추구하는 국가에게는 위기였던 바 그 해결은 유럽 전체의 외교적 과제가 되었다.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발칸과 해로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보스포루스·다르다넬스 해협, 수에즈 운하는 군사·상업적 요충지였으며, 여기에 대한 지배권 확보는 특히 러시아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III. 열강별 동방문제에 대한 이해관계

 

1. 러시아 제국

슬라브 민족 보호자 역할: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를 앞세워 발칸의 슬라브 민족의 자결과 오스만으로부터의 해방을 지지하며 영향력 확대를 추구하였다.

해협 접근권 확보: 러시아는 흑해 함대의 지중해 진출을 위해 보스포루스 및 다르다넬스 해협에 대한 통제권을 원하였다.

정교회 수호자 명분: 오스만령 내 정교회 신자 보호라는 명분을 외교·군사 개입의 논리로 활용하였다. 이는 1853년 크림전쟁의 직접적 명분이기도 했다.

 

2. 오스트리아 제국

발칸 민족주의에 대한 경계: 다민족 제국인 오스트리아는 발칸의 민족독립운동이 자국 내 슬라브 민족에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였다.

러시아의 팽창 견제: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 서발칸에 대한 영향력과 충돌하였다.

현상유지 노선 선호: 오스트리아는 오스만 제국의 급격한 붕괴보다는 점진적 약화를 통한 질서 있는 이양을 선호하였다.

 

3. 영국

인도 루트 보호: 영국은 오스만이 붕괴할 경우 러시아가 지중해와 수에즈로 접근할 것을 우려하였다.

지중해 해양력의 우위 유지: 동지중해의 군사적 균형은 영국 해군의 전략적 기반이었으며,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고자 했다.

오스만 제국과의 우호관계 유지: 상대적으로 개혁 가능한 오스만을 통해 균형 유지에 기여하고자 하였다 (: 1853년 크림전쟁 시 오스만 지원).

 

4. 프랑스

카톨릭 보호자 역할: 프랑스는 오스만령 내 가톨릭 교회 및 교구의 보호권을 내세워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지중해 영향력 유지: 나폴레옹 이후 프랑스는 북아프리카(알제리, 튀니지) 및 동지중해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고자 하였으며, 이는 동방정책과 연결되었다.

러시아 견제 및 국내정치용 외교: 때로는 러시아와 연합(크림전쟁), 때로는 러시아와 협력(1856 파리조약 이후)하며 외교적 유연성을 발휘하였다.

 

5. 프러시아 

소극적 이해관계: 19세기 중반까지 프러시아는 동방문제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으며, 주로 독일통일을 위한 유럽내 세력관계 유지에 집중하였다.

균형외교 지향: 비스마르크 체제 하에서는 러시아·오스트리아와의 삼제동맹 등 동방문제를 통해 오히려 세력균형을 조정하는 기제로 활용하였다.

베를린 회의(1878)에서 중재국으로 등장하며 본격적인 동방 외교에 개입하였으나, 직접적으로 해당 지역에 대한 이익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IV. 결론 및 함의

동방문제는 단순히 오스만 제국의 해체를 둘러싼 영토 분쟁이 아니라, 19세기 유럽 질서 전체를 재편할 수 있는 국제정치적 위기이자 전술적 기회로 기능하였다. 열강들은 각자의 전략적 목표해상 루트 보호, 민족주의 억제, 종교적 명분, 영토 확보를 위해 이 문제에 개입하였으며, 이로 인해 발칸전쟁, 크림전쟁, 그리고 20세기 초의 사라예보 사건 등 일련의 국제적 위기로 이어지게 되었다. 동방문제는 강대국의 해체를 둘러싼 지역적 혼란이 국제적 위기로 전이되는 구조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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